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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소스 왕조의 수도 소안(Zoan)

관리자기자 작성일2008-12-11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자취를 따라서(1)

 
  
▲ 신 왕국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입상 이집트 신 왕국 19 왕조의 위대한 건축 파라오로 불리는 람세스 2세는 타니스에 아몬 신전을 건축하고 자신의 입상들을 세웠다.

힉소스(Hyksos) 왕조는 이집트 제 13 왕조 이후 약해진 이집트의 왕권 쇠락의 때를 맞추어 북방에서 이집트를 침입하여 B. C. 1730년경에 하(下) 이집트 전역을 정복하였다.  그들은 한 종족이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에 분포하였던 도시 국가 연맹체의 셈 종족들이었다.

힉소스(Hyksos)라는 명칭은 이집트어로 ‘이방인 통치자(즉 야만인)’를 뜻한다.

당시 힉소스의 최대 영토는 북방으로는 호리(Horites)족속의 영역인 갈게미스(Carchemish)와 알레포(Aleppo), 하란(Haran)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Euphrates River) 강과 하볼(Habor River) 강이 합류하는 티르가(Tirga) 지역에 달하였다.

힉소스 왕조의 주요 셈 종족은 아무르(Amurru) 종족과 얌하드(Yamhad), 호리(Horites) 종족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인용한 글 중에 ‘마네도’의 [아피온에 대항하여]라는 기록에는 ‘놀라운 모양으로 동방으로부터 경멸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 왔으며, 우리나라(이집트)에 원정을 올 만큼 대담하였으며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쉽게 굴복시켰다.’라고 묘사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힉소스의 침입이 이집트인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과 수치를 주고 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남방의 이집트까지 세력권에 둔 힉소스 왕조는 수도를 소안(Zoan)에 두고 강력한 왕권 행사를 위하여 비옥한 초생 달(Fertile Crescent) 지역과 나일 델타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였다.

성경(Bible)에서 소안은 이스라엘의 헤브론(Hebron) 보다 7년 뒤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민수기 13:22).

이 년대는 대략 B.C 2000년 경으로 상, 하 이집트의 중심 도시  멤피스, 상 이집트의 테베와 더불어 하 이집트의 중요한 수도 역할을 하였다. 

소안은 후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타니로(Tanis)로 명명되다가 현재는 산 엘 하가르(San el-Haggar)로 불리고 있다.  

  

▲ 하 이집트 델타에 있는 타니스 유적지

산 엘 하가르에 있는 타니스 유적지는 이집트 왕조 제 2 중간기(B.C 1785- 1580)

힉소스 왕조의 주도 였다.

 
이집트인이 아닌 셈 종족 계통의 힉소스 왕조는 150년 동안이나 이집트의 델타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에 반하여 상 이집트의 테베에서는 이집트 독립을 위한 소망이 강렬하였다.
그러나 테베의 소군주였던 세켄엔레가 독립 전쟁 중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그의 장자였던 카 모세에 의해 다시 한번 독립 전쟁을 힉소스 왕조와 벌이게 된다.
국토 수복의 염원이 이루어질 찰라에 카 모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 왕조의 수도였던 아바리스와 이곳 타니스를 정복함으로써 150년 간 이집트의 이민족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신 왕국의 시조가 된 파라오 아흐모세 1세 이후, 이집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이집트의 최대 영토를 유프라데스 강과 수단 북부까지 확장 시킨 파라오가 바로 투트모세 3세이다.
투트모세 3세와 카데쉬와 메깃도의 팔레스타인 군주들의 동맹군이 격돌한 것이 그 유명한 메깃도 전투이다(1480 BC.).
메깃도 전투의 승리로 이집트는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수 많은 신 왕국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남겼는데 그 역사적 유물이 타니스에도 많이 남아 있다.
정복왕 파라오 투트모세 3세와 건축왕 라암셋 2세의 치세 기간의 200년 간 이집트는 가장 강성한 왕권과 영토를 가졌으며 수도 테베(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과 웅장한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을 비롯한 왕가의 계곡등이 모두 이 신 왕국의 시기에 건축된 인류사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