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에덴동산의 위치가 궁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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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참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는 제 자신이 신기합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안 보이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어차피 다시 읽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저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죠.
어느 날, 아들이 제 그런 모습을 보고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은 사실인가요?” 하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반문하였습니다. “너는 일본의 신화를 사실이라고 생각하니?”라고. 아들은 즉답했습니다. “아니요.” ‘그것은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네,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 <뉴스->라고 써 있으면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신화>라고 써 있으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역사서, 과학서, 논문 등은 전자의 범주에, 드라마, 동화, 소설 등은 후자의 범주에 넣어 생각합니다. 단, 그것이 얼마나 정직한 사실인지 얼마나 많은 진실 아닌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일일이 따져 볼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한 채 넘어가 버리지요.
그러나 우리는 <사실>이라는 범주에 들어간 이야기에 안심하고, 얕은 믿음을 두기 십상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그저 안심하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사실이 중요하고 사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뿐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실’이 과연 그렇게 중요할까?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실도 진실도 아닌 ‘진리(眞理)’일 것이다. 진리는 진정한 이치(理致)이며, 이치란 도리(道理) 즉 ‘길’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또한 理(리)는 의(義)의 요소를 추구하는 범주의 말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심각하게 생각할 계기가 된 것은 정의(正義, justice)와 공의(公義, righteousness)의 개념입니다. 한자에서는 바를 정(正)의 뜻에는 right의 의미도 있겠지만 영어에선 또 그 개념을 달리해 놓았더군요. 아무튼 세상의 원리 안에서 그때 그곳에서의 정의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바른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하나의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실존하는가? 예수는 진짜 아들인가? 마리아의 임신이? 그 태초라는 말은 언제를 의미하는가? 에덴동산은 어디를 칭하는 것인가? 등등.
물론 사실은 우리에게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은 믿음이 건강할까? 확고할까?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진리’이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거하는 것인가를 되풀이하여 묻는 것이지 않을까?’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냥 한 덩어리의 육에 불과하고 많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요.
오늘 제가 한글과 한자와 영어까지 동원하여 쉬운 말을 어렵게 하진 않았나요?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필요한 분은 가져가시라며 야고보서를 영어로 읽는 책을 주시기에 냉큼 받아왔는데,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평소에는 한글 성경,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궁금할 때는 일본어 성경도 병행해서 읽긴 했는데 영어도 같이 보면 정말 도움이 되는구나, 더 읽어야겠네 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가는데, 아니 글쎄 이 영어와 일본어 대역성경이 떠억하니 길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우리 교회 사람이 일부러? 아니 아니, 하늘도 쳐다봤지요. 내 마음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 도대체 왜 여기에 지금 이 책이?? 그것도 딱 가지고 다니기 적당한 사이즈로.
이것을 그냥 우연으로 여기고 지나가기엔 너무나 아깝습니다. 이것으로 내게 주어진 길, 나를 부르신 뜻을 찾아가려 합니다. 그 뜻을 따라 매주 교회로 발길을 향하는 참된 ‘사실’의 하나를 이루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