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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책을 태우던 집에서, ‘편안한 교회’를 세우기까지
분쟁 없는 목회를 향한 장동창 목사의 기억과 결단

유현우 기자
작성일 2026-01-1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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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독교인물 열전 15, 횡성금성교회 장동창 목사

아버지가 어머니의 성경책을 찢어 아궁이에 던져 넣던 장면은, 어린 장동창의 마음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신앙을 둘러싼 부모의 다툼은 잦았고, 가정의 공기는 늘 팽팽했다. 훗날 그가 교회는 반드시 편안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 이유는, 어쩌면 이 유년기의 기억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장동창 목사의 신앙 여정은 믿음의 전통이 깊은 가문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족 가운데 가장 먼저 교회를 다닌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고향 교회를 혼자 다니기 시작했고 부모는 이를 막지 않았다. 결정적인 변화는 부흥회였다. 권사였던 작은할머니의 권유로 어머니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가정 안에 신앙의 불씨가 살아났다.

그러나 그 불씨는 곧 거센 반대를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교회 출석을 못마땅해했고, 다툼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어느 날, 성경책을 찢어 불태우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 순간 어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이혼할지언정 교회를 버릴 수는 없다.”

울면서도 분명하게 내린 그 선택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신앙을 막지 않았다. 장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어머니의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었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교회 부흥회에서 그의 인생을 바꾸는 또 하나의 순간이 찾아왔다. 특별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린 마음에 내가 평생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하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 그 말을 전하자, 어머니는 그날 밤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린다는 마음으로 감사헌금을 드렸다. 장동창 목사의 소명은 그렇게 가정의 기도 속에서 시작됐다.

중학생 시절, 가정은 또 한 번의 큰 고비를 맞는다. 아버지가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이어졌고, 아버지는 마음을 열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가정에서 속회예배가 회복됐고,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신앙의 가정이 됐다. 그는 이 시기를 가정 전체가 구원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시간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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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 무렵, 교회에는 성격이 거칠 만큼 직선적이고 성령 충만한 담임목사가 부임했다. 특전사 출신이었던 그 목사는 장동창이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하자 곧바로 혹독한 훈련을 시작했다. 교회 청소, 제단 관리, 타종, 주보 제작, 겨울이면 난로 관리까지. 중학교 3학년부터 군 입대 전까지, 그는 교회를 떠나는 날이 거의 없었다. 소명은 감정으로 시작됐지만, 훈련을 통해 다듬어졌다.

신학교 1학년을 마친 뒤 그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입대 한 달 반 전, 아버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장례를 치르고 곧바로 군에 들어간 훈련병 시절은 고통과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의 표현대로 2의 회심의 시간이 됐다. 민통선 근무와 강도 높은 훈련 속에서 그는 오히려 예배를 갈망했고, 부대 안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목후생이라 불리기도 했다. 해병대는 그의 신앙을 무너뜨린 곳이 아니라, 다시 세운 자리였다.

첫 담임목회는 1997년 안산의 한 아파트 상가교회에서 시작됐다. 출석 성도는 7. 그러나 이듬해 IMF 외환위기가 터지며 안산 지역은 직격탄을 맞았다. 공단이 멈추자 성도들의 삶도 무너졌고, 교회 역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여러 차례 교회와 사택을 옮기며 버텨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길을 잘못 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목회자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버텨낸 힘의 상당 부분은 가정에서 나왔다.

2013, 그는 횡성금성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전임 목사의 은퇴 이후 청빙을 받아 교회를 맡았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큰 비전은 선교로 모아졌다. 영혼 구원이라는 본질을 붙드는 선교가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만든다는 확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장동창 목사의 목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편안함이다. 그는 나는 다 참을 수 있지만,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분쟁과 다툼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영적 공격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잦은 갈등, 그리고 모교회에서 목격한 심각한 분쟁의 기억은 그에게 분명한 기준을 세워주었다. 분쟁 없는 교회는 우연이 아니라 의지의 결과였다. 말에 절제했고, 관계를 서두르지 않았으며, 최소 4~5년의 신뢰 형성을 원칙으로 삼았다.

29년의 담임목회 동안 그는 성도 간 분쟁으로 교회가 흔들린 기억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중직자들의 반대나 갈등 없이, 하고 싶은 목회를 해올 수 있었던 이유다. 이는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편안한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분명한 목회 철학의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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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곁에는 늘 아내가 있었다. 신학교 동기의 소개로 만나 1년 만에 결혼한 아내는, 장 목사가 표현하길 목회의 70~80%를 감당한 사람이다. 중요한 결정의 자리에는 나서지 않지만, 가장 객관적인 조언자로 곁을 지켰다. “여보, 잘하고 있어.” 가장 힘들 때 들었던 이 한마디는 지금도 그의 목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자녀 교육 역시 강요보다 삶의 본을 중시했다. 주일성수, 기도, 헌금 생활을 부모가 먼저 실천하며 보여줬다. 아들은 파이프오르간을 전공한 뒤 감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전도사로 사역 중이고, 딸은 치위생사로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내가 자녀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결국 신앙뿐이라고 말한다.

앞으로의 비전은 여전히 분명하다. ‘편안한 교회를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깨어 기도하며, 유혹과 시험 앞에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가능한 길이다.

불신 가정의 소년에서, 해병대를 거쳐, 분쟁 없는 교회를 세워온 목회자. 장동창 목사의 인생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다. 그리고 그 단단함의 뿌리에는, 성경책을 지켜낸 한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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