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소리’로 산 행정가, 이용윤 목사 > 인물 > CDN Christian Daily News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인물

HOME  >  오피니언  >  인물

‘들소리’로 산 행정가, 이용윤 목사
개척교회의 바닥에서 감리교 본부 행정의 최전선까지

유현우 기자
작성일 2026-06-09 11:23

본문

<대한민국 기독교 인물 열전 27>

손주들이 언젠가 할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할지도 모른다.

이용윤 목사는 그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검색창에 이름을 넣으면, 그의 직책과 함께 논란의 단어들도 따라올 수 있다. 감리교 유지재단, 교단 재산, 명의신탁, 고발, 거친 언어. 그가 지나온 공적 자리에는 이런 말들이 함께 남아 있다. 그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것은 인터뷰의 마지막에 그가 손주들에게 남기고 싶다고 한 말이었다.

약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은 노년의 덕담처럼 들리지만, 그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무게를 갖는다. 그것은 그가 어머니에게서 먼저 배운 삶의 태도였고, 교단 행정의 거친 현장을 지난 뒤에도 끝내 붙들고 싶었던 신앙의 언어였다.

들소리라는 이름, 어머니의 밥상에서 배운 신앙

이 목사는 자신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들소리 용윤이라고 적어두었다. 그는 이 표현이 한 선배가 붙여준 별칭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원래는 야성이었다. 들 야(), 소리 성(). 선배는 현실에 쉽게 순응하지 않고, 개혁적이며, 때로는 거칠게라도 할 말을 하는 그의 성향을 보고 그렇게 불렀다. 그는 한자식 표현보다 우리말이 좋아 들소리라고 바꿔 썼다.

그에게 들소리는 단순한 호가 아니었다. 제도 안에 있으면서도 제도에 갇히지 않으려는 자기 이해였다. 신앙적으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와도 닿아 있었다. 그 설명 안에는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이 들어 있다. 그는 제도 밖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리교 본부와 유지재단, 한교총 같은 제도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는 조용한 조정자이기보다 문제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이 목사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 어린 시절 형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의 신앙이 처음부터 그의 삶을 이끈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신앙에 적극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 목사는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 오래 풀리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반대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따뜻하고 선명했다. 응암동 일대가 가난한 이들의 삶터였던 시절,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밥을 먹였다. 숟가락이 없어 밥을 먹고 숟가락을 가지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신학의 언어로 약자 돌봄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밥상을 내주었다. 이 목사는 자신 안에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라고 했다.

62a7fda134726271d9b3126de43e3c03_1780971789_2891.jpg

폐결핵과 개척교회의 바닥, 행정가로 이어진 길

그의 청소년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폐결핵으로 학업을 멈춰야 했다. 친구들은 다음 학년으로 올라갔고, 그는 1학년에 남았다. 그 박탈감은 컸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병중의 어머니를 보며 다시 마음을 붙들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어머니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무렵 부흥회에서 성령 체험을 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감리교신학대학에 지원하며 쓴 신앙고백서에는 청소년기의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적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소명은 환한 확신에서만 시작되지 않았다. 좌절과 병,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교회가 자신을 붙들어주었던 기억 속에서 천천히 자라났다.

감리교신학대학을 거쳐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뒤에도 그의 길이 곧장 열리지는 않았다. 귀국 후 그는 개척교회로 시작했다. 30명 안팎이 모이는 교회였다. 이후 암사동의 지하 공간으로 옮겨 목회를 이어갔다. 전도도 했고, 예배당도 정비했다. 사람들은 깨끗하다고 말했지만 다음 주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시간을 자존심이 무너지는 시간으로 기억했다.

이 대목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는 처음부터 교단 행정가로 서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병든 어머니 곁에 있던 소년이었고, 폐결핵으로 멈춰 선 학생이었으며, 지하 예배당에서 사람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던 개척교회 목사였다. 그 바닥의 시간이 없었다면 훗날 그의 강한 행정도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그는 당시 2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했다. 기대했던 외적 결과가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하나님이 자신을 바닥으로 이끄셨고, 그 자리에서 다른 길을 준비하셨다고 해석했다. 그 다른 길이 교단 본부 행정이었다.

2002년 그는 감리교 본부 교육국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행정과 기획에 맞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일이 눈에 보였다고 했다. 머리에서 구상이 되면 실제로 움직여 결과들을 도출했다. 교육국 시절 그는 여성 목회자와 여성 신학생 지원, 다음 세대 교육, 장학 사업, 청소년 관련 법인과 사역, 유학생 대회 등 여러 일을 추진했다. 청소년을 돌보고 싶다던 신학생의 고백은 목회 현장이 아니라 교단 교육 행정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이후 그는 수년간 연수원에서 목회자 연장 교육과 영성 훈련을 제도화하고 실시하였다. 그리고 사무국 총무의 자리에 섰다. 이 시기 그는 감리회관 공실 문제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었다고 설명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감리회관의 공실률과 년 20억 적자 문제는 심각했고, 그는 외부 네트워크와 실무 감각을 동원해 재정 구조를 안정시키려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가 사무국 총무의 자리를 단순한 관리직이 아니라 교단 자산과 운영을 책임지는 자리로 받아들였던 것은 분명하다.

교단 안정의 최전선, 논란과 성찰 사이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논란도 생겼다. 교단을 탈퇴한 개교회 재산 문제와 관련해 그가 명의신탁주장에 동조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는 특정 사안에서 확인서를 써준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당시 사회법상 판단과 교단 장정상 원칙이 충돌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복수의 법률 자문에서 사회법상 명의신탁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을 들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대목은 그의 설명만으로 정리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관련 확인서와 고발 결과, 당시 법률 자문과 교단 내부 판단이 함께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다. 다만 이 인터뷰에서 그는 해당 논란을 교단 재산을 해치려 한 행위가 아니라 사회법과 장정 사이에서 발생한 판단의 충돌로 설명했다.

행정 처리 과정에서 그의 언어는 자주 문제가 됐다. 그는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고, 때로 거친 표현도 사용했다. 스스로도 예전에는 욕도 많이 하고 화가 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2020년 이철 감독회장 체제에서 행정기획실장 역할을 맡았을 때, 그가 붙든 키워드는 교단 안정이었다. 2008년 이후 감리교는 선거와 재판, 감독회장 직무 문제 등으로 오랜 혼란을 겪었다. 이 목사는 이철 감독회장의 온화한 리더십과 자신의 실무 추진력이 맞물리며 교단 안정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교총 활동을 통해 감리교의 위상을 회복하려 했고, 내부적으로는 재판과 갈등을 수습하는 일을 맡았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교단 행정가의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사람과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 셋째는 상황을 읽는 지혜다. 행정은 문서와 절차의 일이지만, 그에게는 하나님께 묻고 사람을 설득하며 교단 전체를 바라보는 판단의 일이기도 했다.

그의 곁에는 아내의 한 문장이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기보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를 보라.” 그는 교단의 혼란과 자신을 둘러싼 비판을 지나며 이 질문을 붙들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이용윤 목사의 삶은 한쪽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 그는 따뜻한 목회자 이미지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강했고, 거칠었고, 부딪혔다. 어떤 이들에게 그는 필요한 실무자였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 그는 교단을 위해서였다고 말하지만, 그 방식까지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논란만으로 그의 삶을 덮어버릴 수도 없다. 개척교회의 바닥을 지나 본부 행정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했고, 감리교의 교육·재정·행정·연합 실무 안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인물사는 칭찬만으로도, 비판만으로도 완성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신앙은 성과와 흠, 확신과 후회, 억울함과 성찰 사이에 남는다.

손주들이 언젠가 그의 이름을 검색할지도 모른다. 그때 화면에 무엇이 먼저 뜰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손주들에게 직접 남기고 싶어 한 말은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직책의 이름으로만 기억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검색창에는 논란이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손주들에게 남기고 싶어 한 것은, 약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믿음이었다.

기사 공유하기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