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끝까지 예수 잘 믿어라” 어머니는 아들의 팔을 베고 떠났다
섬마을 어머니의 찬송을 붙든 목포한일교회 채복남 원로목사
본문
<대한민국 기독교 인물 열전 31>
동생이 태어난 날이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전남 신안 비금도에는 병원이 없었다. 의사를 부르려 해도 목포까지 뱃길을 건너야 했다.
어머니는 열다섯 살 아들의 팔을 베고 누웠다.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은 팔을 빼지 못한 채 어머니 곁을 지켰다. 어머니는 그 팔 위에서 숨을 거뒀다.
그 팔은 어머니의 찬송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어른이 된 뒤로는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밤이면 잠든 아들 곁에서 찬송을 불렀다. 낮에는 아들에게 찬송가를 한 소절씩 가르쳤다. 그리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는 끝까지 예수 잘 믿어라.”
교회에 가지 못한 어머니가 남긴 것은 찬송 몇 곡과 그 한 문장이었다. 아들은 그것을 붙들고 목사가 됐다. 목포한일교회 채복남 원로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원망한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엔 원망이 들어오기도 했지요. 그런데 몇 년 지나니 알겠더라고요. 하나님이 살리실 수 있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살리셨을 겁니다.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그 뒤로 어머니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만 남았습니다.”
“고생한 기억은 하나도 안 납니다”
비금도는 기독교 역사가 120년에 이르는 섬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신앙이 닿은 신안 섬들 가운데서도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 꼽힌다. 채 목사는 아홉 살부터 교회에 다녔다.
집안의 가장은 사실상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2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40대에 돌아왔다. 귀국한 뒤에도 한국 노래를 하나도 몰랐고, 술을 마시면 혼자 일본말을 하곤 했다. 신앙생활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집안은 기울었고, 그는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어머니를 잃은 그해 그는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봄에는 서기행 목사에게 학습을, 가을에는 손재명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예배당이 차고 넘쳐 강대상 위까지 사람이 앉았다. 소년은 울면서 강대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 돌아간 뒤에도 혼자 남아 기도했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죽어도 목사의 길로 가겠다.”
학교에서 그의 별명은 ‘목사’였다. 그는 그날 이후 주일예배와 밤예배를 빠진 기억이 없다고 했다. 중학생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
중학교를 마친 뒤에는 광주로 올라갔다. 낮에는 약국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스물세 살에 전도사가 됐다. 군 복무를 마친 뒤 1979년 서울신학교에 입학했고, 교단이 분열하는 격랑 속에서 개혁신학교로 옮겨 1981년 졸업했다. 1983년 목포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시절 그는 삼각산과 도봉산의 기도원을 자주 찾았다.
“생활이 어려웠던 건 맞아요. 그런데 고생한 기억은 하나도 안 납니다. 오직 사명이었으니까요. 그냥 즐거웠어요.”
강단에서 하지 않은 말
서른 무렵 목포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3년 만에 예배당을 짓고 10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세웠다. 이때 전환점이 찾아왔다. 목포신도시에 교회를 개척한 동료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교회가 후임으로 그를 청빙했다. 대리석으로 지은 600평 규모로 1층은 상가로 2-3층은 교회였다.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를 두고 그 교회로 갔다.
담임목사를 잃은 교회에는 70명 남짓이 남아 있었다. 그를 따라온 성도 30명이 더해졌고, 반년쯤 지나자 300명이 모였다. 문제는 건물에 남은 부채와 1층에 들어선 상가 40여 곳이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장사가 되지 않았고, 상인들과 갈등이 이어졌다. 신도시를 채웠던 조선소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잃고 떠났다. 끌려다니느니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그는 판단했다. 교회는 경매로 넘어갔다. 300명이던 성도는 100명으로 줄었다.
“창피했지요. 한창 잘나간다는 소리를 듣던 때였으니까요.”
그는 바깥 출입을 끊었다. 대신 하루에 한 권, 어떤 날은 두 권씩 책을 읽었다. 그리고 강단에서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교회가 넘어간다는 이야기도, 헌금을 더 해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슬프다, 어렵다, 힘들다는 말을 설교에서 한 기억이 없어요. 성경 보고, 기도하고, 책 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빚쟁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혼자 감당했다. 남은 100명 가운데 떠난 사람은 없었다. 2년 뒤 교회는 170평 건물을 마련해 예배를 이어갔다. 그가 그 시간을 지나며 얻은 결론은 짧다. “다 지나가더라고요.”
65세에 그는 마지막 건축을 결심했다. 600평 땅에 350평 예배당과 차량 50대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을 만들었다. 예배당은 작게, 주차장은 넓게 지었다. “교회 지을 때 제일 시험이 많이 듭니다. 후임이 와서 그 짐을 지지 않도록 내가 짓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입당 직후 80여 명이 새로 등록했지만, 곧 코로나19가 닥치면서 대부분 흩어졌다. 그사이 건강도 나빠졌고, 그는 정년을 몇 해 앞두고 강단을 내려왔다. 노후를 묻는 후배들에게 그는 늘 같은 답을 한다. “목회만 열심히 하면 그게 노후 대책입니다.”
압해도, 문을 열어 둔 집
은퇴 후 그는 신안 압해도에 집을 지었다. 집 옆에는 손님과 차를 나누는 작은 별채도 올렸다. 4년 동안 이 집을 다녀간 사람은 3천~4천 명에 이른다. 요즘은 하루에 20~30명이 찾아온다. 이렇다 보니 일주일에 원두 2kg가 사용된 적도 있다.
친척들이 집 짓는 데 보태라며 건넨 수천만 원은 손님을 대접하는 데 모두 썼다. 은퇴 축하금 3천만 원 가운데 2천만 원은 제주의 한 작은 교회에 보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들이 말했다. “아빠는 그런 일을 잘해요.”
그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말로 가르친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한 적이 없어요. 내가 하는 걸 보고 따라와 줬지요.”
요즘은 35년 동안 교회가 후원해 온 선교사들과 오랜 동역자들이 찾아와 “밥 사드리러 왔다”며 그를 데리고 나간다. 사람을 맞다 보니 4년이 금방 갔고, 그사이 앓던 병을 잊었다고 했다.
평생 붙든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이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그게 그냥 제 삶이었어요.”
그에게는 손자만 다섯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목회자의 길을 걷기를 기다린다. 얼마 전 한 손주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 문턱을 넘지 못한 섬마을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맡에서 부르던 찬송은 일흔다섯 해를 건너, 이제 손주들 앞에 와 있다.
